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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순교지 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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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라-영광・영암 :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전쟁과 순교

Date: 2016.05.23, 7:13:11

당당뉴스    유성종  |  yoojong21c@naver.com

 

연재 5

전라 - 영광・영암 :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전쟁과 순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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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 염산교회

전라남도 영광과 영암에는 세계 개신교 역사에 기록된 세계적인 순교지가 있다.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의 교회 탄압에 항거해 신앙을 지키려다 194명이 순교했는데, 이들은 모두 영광군 염산면에 있는 두 교회와 인접한 영암면에 있는 교회의 성도들이었다.

광주에서 승용차로 1시간 정도 가면 작은 어촌인 영광군 염산면 봉남리 설도마을을 만날 수 있다. 설도항에 자리한 염산교회는 77명의 순교자를 낸 곳으로, 한국 기독교 역사상 단일 교회에서 가장 많은 순교자가 나온 곳이다.

염산교회는 유진 벨 선교사를 통해 복음을 전도 받은 허상(후에 장로가 됨)의 기도로 시작되어 1947년에 교회로 발전했다. 일제강점기 3?1만세운동을 주도한 적이 있는 그는 예수님을 영접한 뒤 평양신학교에 입학해 목사가 되었다. 그 후 산간벽지와 오지의 교회만을 섬기던 중 1950년 3월 10일 염산교회 담임으로 부임했고,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당시 염산면 인근 산간지대는 빨치산의 은거지였다. 이들은 밤이면 마을에 내려와 양식과 가축을 약탈했고, 종종 염산교회에 들어와 목사에게 시비를 걸고 행패를 부렸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2대목사가 자리를 사임한 뒤 김방호 목사가 부임했다.

드디어 전쟁이 시작되었고, 북한군은 파죽지세로 남한 전역을 삼켰다. 1950년 7월 23일 주일 오후, 염산 지역에 들어온 북한군은 산속에 숨어 있던 빨치산과 합세하여 염산교회를 인민위원회 사무실로, 목사의 사택을 인민군 숙소로 정한 뒤 김방호 목사 가족을 내쫓았다. 하지만 김방호 목사는 마을을 떠나지 않고 불안해하는 성도들 곁에 남았다. 그는 가정을 심방하며 교인들을 위로하고, 기도하고 예배를 드렸다.

그러던 중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서울이 수복되고, 국군과 UN군이 나주와 함평을 거쳐 영광읍으로 진격한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북한군과 빨치산은 교회와 성도들을 상대로 잔인하게 보복을 시작했다. 국군과 UN군 환영대회를 주도했던 기삼도(당시 목포성경학교 학생)를 죽창으로 찔러 죽인 것을 시작으로 함께했던 노용길 등 3명을 무거운 돌멩이를 매달아 교회 옆에 있는 설도 수문 위에서 바다에 빠뜨렸다.

단지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공산군은 어린아이들까지 무참히 죽창으로 찌르고 몽둥이로 때린 뒤 돌을 매달아 바다에 빠뜨렸다. 죽음을 앞두고 어린아이가 칭얼대며 울자 업고 있던 언니가 “울지 마라. 우리는 곧 천국에 간다”고 달래기도 했다. 이 일화를 근거로 후에 교인들은 순교자 기념시비에 ‘우리는 천국에 간다’고 새겨넣었다.

노병재 집사는 자신의 일가족 11명과 동생 가족 11명이 한날 한 시에 순교를 당했다. 그들이 설도 수문에서 수장당한 뒤 허상 장로 부부가 인근 산골짜기에서 죽창에 찔리고 스데반처럼 돌무더기에 깔려 숨졌다. 이들은 모두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를 드렸다.

마침내 가정집에서 비밀 예배를 계속했던 김방호 목사 가족이 인민군들에게 끌려나왔다. 부인과 5남매 그리고 손녀까지 모두 그날 순교했다. 증언에 따르면 당시 공산군은 김방호 목사의 자녀들에게 “아버지를 때려 죽이면 너희들은 살려 주겠다”고 회유했으나 자녀들은 그들의 회유에 응수하지 않고 대신 하늘을 향해 “주님의 뜻이라면 순교의 영광을 주옵소서”라고 기도했다고 한다. 김방호 목사는 자녀들에게 살인자들을 미워하지 말라고 당부한 뒤 피를 토하며 순교했다.

김방호 목사가 순교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교회를 떠났던 2대 목회자 원창권 목사가 돌아와 성도들을 지키다가 순교했다. 이로써 염산교회는 1, 2, 3대 교역자 전원과 77인의 교인들이 순교했다. 그 일이 벌어지는 데 걸린 시간은 무려 3개월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도망가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도망가지 않았고, 생명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증거하며 믿음을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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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에 의해 완전히 수복된 1951년 2월 24일 수요일 밤, 살아남은 자들이 다시 예배를 드렸다. 몰래 땅속에 묻어 두었던 성경책과 찬송가를 들고 교회에 다시 모습을 보인 이들은 불과 성도의 3분의 1뿐이었다. 그 날의 예배는 이 마을 출신 신학생으로 겨우 죽음을 피한 안종렬 전도사가 인도했다. 안 전도사는 순교한 교인들의 시신을 찾아 매장하고 실의에 빠져 있는 유족들을 위로했다.

그리고 그해 부활절 즈음, 김방호 목사의 아들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둘째 아들 김익 전도사가 4대 교역자로 염산교회에 부임했다.

“저는 김방호 목사의 둘째 아들입니다.”

이렇게 시작한 그의 음성은 깊은 상처로 닫혔던 생존자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그 누구도 위로할 수 없을 것 같았던 그들의 마음은 김익 전도사에 의해 열리기 시작했다. 인민군 편에 섰던 주민들은 김익 전도사가 자기 아버지를 살해하는 데 동조한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없었다. 하지만 김익 전도사는 부모를 살해하고 교인들을 학살하는 데 가담했던 사람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그들의 두려움을 없애 주고 복음을 전했다. 김익 전도사의 사랑으로 마을에는 참회와 회복의 기쁨이 흘렀다.

하지만 충격 후유증으로 급격하게 시력을 잃기 시작한 김익전도사는 곧 염산교회를 사임했고 42세의 젊은 나이에 아버지가 기다리는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그 이후 염산교회는 가슴 아픈 그날의 사건을 함구했다. 관련자들도 하나둘 세상을 떠나고 그날의 역사는 완전히 잊히는 듯했다.

그러던 중 18대 담임인 김태균 목사가 부임했다. 그는 염산교회가 뜨거운 순교자의 피가 흐르는 교회라는 사실조차 모르고 부임했다가 뒤늦게 그 사실을 알고 기념사업을 시작했다. 순교공원, 순교탑, 순교체험관 등을 만들고, 순교자 유해를 모아 교회 앞마당 큰 묘지에 합장했다.

염산교회 안에는 당시의 증거 자료들이 있다. 당시 교인들의 목에 매달아져 수장될 때 쓰인 묵직한 돌들, 순교한 교인들의 사진과 재건 상황 등을 정리해 놓았다. 염산면 설도항에는 교인들이 순교한 그 자리에 순교탑이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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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월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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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월교회는 염산교회에서 차량으로 5분 정도의 거리에 있다. 1908년 유진 벨 선교사가 개척한 교회로, 일제강점기에도 교회를 중심으로 농촌계몽운동과 애국운동, 신앙교육을 전개하며 아름답게 성장한 교회였다. 그 교회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오는 글귀가 있다.

“순교는 죽음이 아니고 새로운 시작입니다.”

순교기념관 입구에 새겨져 있는 이 글귀에 잠시 가슴이 먹먹해져 있다가 순교기념관 안으로 들어가면 장엄한 하나님의 주권을 선포하는 글이 찾는 이들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역사의 시작은 이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있고 그 위에 세워진 교회 또한 주님의 것이다.”

이 교회에서 순교는 성도의 당연한 삶의 결과이며, 믿음은 생명을 걸고 지켜야 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1950년 9월과 10월 사이에 이 교회의 65명 성도가 모두 순교했다. 당시 9살이었던 최종한 장로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증언한다.

“인민군들이 낮에 구덩이를 파 놓고 해가 떨어지면 한 가족씩 새끼로 묶어서 생매장한 뒤 죽으면 바닷물에 던져버렸다. 가족이 몰살을 당했기 때문에 시체도 찾질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참혹한 사건은 한국전쟁 발발 사흘 전인 6월 22일에 시작되었다. 당시 북한군 일부가 이 지역에 상륙해서 후방 교란작전을 수행하려고 했다. 그런데 북한군 중 한 사람이 야월교회 성도의 권유로 자수했다. 그런데 그만 지역 경찰이 자수한 인민군을 총살하고 말았다.

그로부터 사흘 후 전쟁이 시작되고, 이곳 역시 북한군에게 점령당했다. 그런데 불과 석 달 뒤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국군과 유엔군이 함평, 영광 지역을 수복했다. 기독교 인사와 우익 인사들이 대대적인 환영 행진을 하고 만세를 불렀다.

인근 산속에서 미처 후퇴하지 못한 인민군들은 이 사실을 알고 마을 주민들에게 보복을 시작했다. 그들은 낮에는 산속에 숨어 있다가 야밤에 내려와 마을을 점령하고 동네 유지들을 끌어다가 마을 주민들이 보는 앞에서 인민재판을 벌였다. 그리고 그들이 마을 주민의 피와 땀을 착취한 악질 반동분자라고 말하며 마을 사람들에게 처분을 물었다. 인민의 적이니 처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야월교회 김성종 집사가 이렇게 답했다.

“아닙니다. 그 사람은 흉년으로 마을 사람들이 먹을 게 없어 고통받을 때 쌀을 사람들에게 나눠 주었습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입니다. 나라에서 표창을 주어야 할 판인데 상을 주지 못할망정 사람을 죽일 수 있습니까?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됩니다.”

그러자 겁에 질려 있던 마을 주민들도 용기를 얻어 그들을 죽여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야월교회 성도들 때문에 지역 유지들을 제거하는 데 실패하자 북한군은 야월교회 성도들을 죽일 궁리를 하게 됐다. 그 과정에서 북한군 병사를 자수하게 해서 결국 총살당하게 만든 이가 야월교회 교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졌고, 순식간에 야월교회 성도들은 북한군의 집중 보복 대상이 되었다. 일촉즉발의 위험이 다가오는 와중인데, 온다 했던 국군은 더디기만 했다. 실제로 야월교회가 있던 염산면은 가장 늦게 수복이 된 지역이었고, 그로 인해 무고한 많은 성도들이 목숨을 잃어야 했다.

인근 지역의 빨치산과 인민군들은 수시로 내려와 인민재판을 열고 야월교회 성도들을 처형하기 시작했다. 죽도록 두들겨 팬 뒤 돌을 매달아 바닷물에 던지는 식이었다. 최우선 처형 대상은 교회 지도자들이었다. 그사이 집사에서 영수가 되어 교회를 이끌고 있던 김성종을 비롯, 조양현 영수, 최판섭 집사, 최판원 집사, 김두석 성도 등은 염산 설도 수문 앞에서 돌을 매달아 바닷물에 빠뜨렸다. 당시 조양현 영수와 최판섭 집사는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옥고를 치르다 해방이 되자 석방되어 마을로 돌아와 있었다. 그러던 중에 한국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원래 최판섭 집사는 지금의 가기도에 피난을 가 있었다. 그런데 교회 성도들과 가족들이 모두 처형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집으로 돌아왔다가 체포되고 만 것이었다. 형인 최판원 집사에 이어 동생인 자신까지 인민군에게 잡혀가게 되자 그는 눈물을 흘리는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식이 되어 어머니보다 먼저 죽는 것은 불효이지만, 하나님이 부르시니 먼저 가겠습니다.”

그는 모진 고문을 당한 뒤 형과 함께 설도 수문에서 처형당했다. 인민군은 교회 지도자들을 처형한 뒤 그 가족들을 끌어다가 동네에 있는 창고에 가뒀다. 그리고 밤마다 한 가족씩 처형했다. 밤이 되기를 기다리는 동안 창고에 갇힌 사람들은 온 마을 사람들이 다 듣도록 찬송을 부르고 기도를 멈추지 않았다.

두우리 쪽 큰북재 너머에는 이리마을 공동묘지가 있다. 인민군들은 이 공동묘지 앞쪽에 깊은 구덩이를 파고 교인들을 밀어넣어 생매장해서 죽이기도 했다. 반항하면 칼이나 대창으로 찔러 강제로 구덩이에 몰아넣고 흙을 덮었다. 염전도 사람들을 산 채로 생매장터로 변했다. 나중에는 기독교인이 아닌 주민까지 죽였다.

65명의 교인 전원이 순교를 당하고 나자 인민군들은 텅 빈 교회에 불을 지르고 달아났다. 1952년 공산당이 완전히 퇴각한 뒤 대대적인 유해 발굴 작업이 진행됐다. 기독교인이 아닌 사망자 80구는 육안으로 신원을 파악할 수 없는 상황이어서 입은 옷 등으로 신원을 확인한 뒤 장사를 치렀다. 다행히 야월교회 순교자 65명의 신원은 모두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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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야월교회 예배당 옆에 야월교회기독교인순교기념관이 문을 열었다. 이 기념관은 야월교회 순교자뿐 아니라 희생이 많았던 영광군의 기독교 순교자들을 모두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호남 선교의 역사를 비롯해 순교 영성을 체험할 수 있는 전시실과 한국 교회 대표적인 순교자들의 사진이 전시된 추모관이 있다. 이 중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것은 전시관 중앙부에 세워진 거대한 조형물 ‘맞잡은 손’이다. 이 손의 의미를 야월교회 사람들은 이렇게 전해 주고 있다.

“맞잡은 손의 한쪽 손은 상처 나고 찢긴 손이고, 한쪽 손은 거룩한 손입니다. 상처 난 손은 순교자들의 아픔을 표현하고, 거룩한 손은 하나님을 상징합니다. 순교자들이 하나님을 만남으로 치유되고, 더 나아가 용서와 화해를 이루자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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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월교회

상월교회는 우리나라에서는 희귀한 그리스도의교회 교파에 속하는 교회다. 상월교회는 영암군에 가장 먼저 들어선 그리스도의교회 소속 교회로서, 1947년 진성구가 자신의 집을 예배 장소로 제공하면서 시작됐다. 이후 신덕철 전도사가 초대 교역자로 부임하면서 상월교회로 발전했다.

상월교회는 한국전쟁 당시 영암군 내에서 가장 많은 순교자가 있었던 교회다. 1950년 10월 하순, 영암까지 내려온 인민군과 빨치산은 신덕철 전도사를 비롯하여 성도 35명을 처형했다. 당시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도 끝까지 신앙을 지킨 성도들의 일화는 지금까지 상월교회의 숭고한 역사로 전해져 오고 있다.

이들의 순교는 염산면의 야월교회나 염산교회 성도들의 순교와 성격이 같다. 국군의 서울 수복 이후 철수하는 북한군의 보복 조치로 시작됐다. 궁지에 몰린 북한군 잔당과 좌익 세력은 교회 건물 안에서 반공 인사와 성도들을 무자비하게 처형했다. 주민들은 총칼의 공포에 떨었지만 성도들은 죽음 앞에서도 신앙을 지키며 끝까지 의연한 태도를 보였다.

당시 60세였던 임유상 집사는 일가족과 함께 붙잡혀 처형장으로 끌려가는 중에도 “날빛보다 더 밝은 천국 믿는 맘 가지고 가겠네”로 시작하는 찬송을 불렀다. 특히 어린 딸들이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보면서도 끝까지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보여주었다. 40세였던 신덕철 전도사는 아내, 그리고 아내의 가족들과 같이 순교했다.

광주 양림교회 박석현 목사는 전쟁을 피해 처가에 왔다가 죽임을 당했다. 끌려가면서도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라는 찬송을 불렀다. 처형장에서 잠깐 기도할 시간을 구한 그는 큰 소리로 기도를 한 뒤 죽음을 맞이했다. 순교자 중에는 9살에서 12살 사이의 교회학교 학생들과 엄마 배 속에 막 잉태된 어린 생명도 있었다. 교인들을 처형한 뒤 인민군은 교회를 부수고 방공호로 만들었다.

전쟁 후 한동안 마을회관을 매입하여 예배를 드리던 교인들은 1972년 다시 상월교회를 건축했고, 1993년에는 교회 앞에 순교비를 세웠다. 비석 뒷면에는 순교한 25명의 이름을 새겼다. 그나마도 신원이 불확실한 이들의 이름은 새겨넣지 못했다. 그리고 이들의 신앙과 순교정신을 기억하기 위하여 매년 11월 첫째 주일을 순교자 주일로 정하여 기념예배를 드리고 있다. 2009년에는 교회에서 1km 정도 떨어진 순교 현장에도 순교비를 건립했다.

염산리와 야월리에는 지금도 그때의 일을 직접 목격하고 생생하게 기억하는 이들이 생존해 있다. 비록 이름 없는 작은 산골 마을이지만 염산리와 야월리는 위대한 순교자의 땅이다. 목숨을 위협하며 믿음을 부인하게 만드는 사나운 칼날 앞에서 의연하게 믿음을 보인 이들이 흘린 고귀한 피가 있었기에 오늘날 우리에게 신앙의 자유와 하늘로부터의 풍성한 축복이 임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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