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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선교지소식 전라 – 여수・순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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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전라 -여수・순천:그 바닷가엔 마을마다 섬마다 교회가 있더라
Date: 2016.06.08, 11:59:54

당당뉴스

유성종  |  yoojong21c@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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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6

전라 – 여수・순천 : 그 바닷가엔 마을마다 섬마다 교회가 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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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양원

광주기독병원의 병원장이었던 로버트 윌슨은 1909년 여름, 병원 인근 봉선리에서 나병 환자 10여 명을 치료한 것을 시작으로 나병 환자들을 위한 광주나병원을 설립했다. 영국 에든버러에 있는 영국 한센병자협의회로부터 도움을 받아 설립된 광주나병원은 나병 환자 수용소, 진료소, 교회 등을 갖춘 나병 전문 치료기관이었다.

나병 환자를 받아 주는 병원이 있다는 소문은 급격히 퍼져 나가 1924년에는 광주나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나병 환자가 560여 명에 이르렀다. 그러자 광주 시민과 일본 정부는 전라남도의 정치 교통 중심이었던 광주에 전염성이 강한 나병 환자들이 몰리는 것을 꺼려하여 외진 바닷가 지역인 여수로 이전하게 했다. 이에 따라 1928년, 로버트 윌슨은 나병 환자 600여 명과 함께 광주나병원을 여수로 옮겨 갔다. 그때부터 ‘애양원’(사랑으로 양을 키우는 동산)으로 이름을 바꾸어 오늘날까지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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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애양원은 손양원 목사의 순교지로 많이 알려져 있다. 1939년 7월 14일 애양원 교회에 부임한 손양원 목사는 1945년 9월 10일부터 10월 15일까지 병원 원장을 겸임했다. 손양원 목사는 나병 환자들과 함께 먹고 자고 뒹굴며 예수님의 사랑으로 그들을 사랑했다. 이미 나락으로 떨어져 더 이상 눈물도 절망도 없을 것 같은 나병 환자들에게 거침없이 손을 잡고 기도하고 위로해 주며 새 삶을 살 희망을 심어 주었다.

일제강점기 말, 일본의 기독교 탄압은 더욱 거세어졌고,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손양원 목사는 부임한 지 채 1년도 안 되어 투옥되었다. 그와 함께 애양원의 운영 권리도 선교사들의 손에서 일본인에게 넘어갔다. 이후 환자들에게 공급되는 식사가 하루 세 끼에서 두 끼로 줄어드는 등 환자들도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다.

손양원 목사가 다시 애양원으로 돌아온 것은 해방 후였다. 그런데 그즈음 한반도를 휘청하게 만들었던 치열한 좌우 대립의 여파로 여순사건이 1948년에 일어났다. 그 와중에 손양원 목사의 두 아들, 동인과 동신이 좌파 세력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꽃다운 나이였던 두 아들을 한꺼번에 잃어야 했던 고통 속에서도 손양원 목사는 주일예배 설교 때 “9가지 감사”라는 제목으로 두 아들의 순교에 대해 주님을 찬양했고, 아들을 죽인 청년을 용서한 뒤 양자로 삼았다.

이후 한국전쟁이 시작되고, 북한군과 빨치산의 위협이 거듭되는 와중에도 손양원 목사는 가족들만 피난을 보낸 뒤 애양원에 홀로 남아 거동이 불편해서 피난을 가지 못하는 나병 환자들을 돌보았다. 그러다가 1950년 9월 28일, 유엔군에 쫓겨 가던 공산군에게 총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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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애양원은 서현식 목사와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 엘머 보이어(Elmar T. Boyer, 한국명 보이열)의 협력으로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1921년에 한국에 온 엘머 보이어는 요양소를 세워 나병이 완치된 330명에게 삶의 희망을 불어넣어 준 인물이다. 애양원은 1967년에 여수 애양재활병원으로 이름을 바꾼 뒤 나병 환자들뿐 아니라 장애인들까지 치료하는 기관으로 발전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손양원목사순교기념관은 1993년 애양원 성산교회 성도들의 건축헌금으로 건립되었다. 기념관은 ‘ㅅ’자 형태인데 삼위일체를 상징하기도 하며, 손양원과 두 아들을 기념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여수시는 2012년에 손양원목사유적지테마기념공원을 조성했다. 애양원, 성산교회, 애양원박물관, 순교기념관, 삼부자의 묘, 사랑의 열매탑, 토플하우스 등 공원을 거닐면 애양원의 역사와 현재를 한 번에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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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 선교 구역

앞서 미국 남장로회에서 조선에 7인의 선발대를 파견했다고 언급한 바 있다. 이 7인의 선발대는 먼저 전주에 선교 본부를 세운 뒤 이후 군산, 목포, 광주로 선교 영역을 확장했다. 2016-06-08 11;55;55그러던 중 1894년 윌리엄 레이놀즈, 아다머 드류 일행이 처음으로 순천을 방문한 것을 계기로 다른 선교사들의 방문이 이어졌고, 마침내 16년 뒤인 1910년에 미 남장로교 순천선교부가 설치되었다. 순천선교부는 순천을 중심으로 여수, 고흥, 보성, 구례, 곡성, 광양, 여수 앞바다의 도서 지방을 대상으로 활발한 선교활동을 벌였다. 그래서 지금도 순천 매산등 일대는 당시 활동했던 선교사들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어 ‘순천 선교구역’으로 불리고 있다.

대표적인 곳이 바로 매산등에 있는 선교사 마을이다. 선교사 마을이 들어선 곳은 원래 돌이 많아 죽은 어린아이를 장사지내던 땅이었다. 선교사들은 사람들이 버린 이 땅을 구입해서 자신들의 거처로 삼았고, 약 70명의 선교사들이 이곳에서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이곳은 마을에서 상당히 떨어진 곳이었는데, 그것은 당시 조선인들에게 유행했던 풍토병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선교사 마을은 10여 년에 걸쳐 20여 채를 세우는 동안 건축 기법이나 마을의 구성이 비교적 짜임새 있고 체계적으로 형성되었다. 선교사들은 목포, 광주 등의 선교부를 거치며 체험한 노하우를 적용하여 도로, 상하수도, 전기, 교육과 의료시설을 계획적으로 만들어 나갔다. 이와 함께 인근에 외국인 자녀를 위한 외국인 어린이 학교도 들어섰다.

오늘날 이 선교사 숙소와 학교는 문화재청과 전라남도의 문화재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당시 매산등 일대는 순천 선교의 중심이자 순천 근대화의 시발점이었다. 순천시 가장 높은 곳에 들어선 이 아름다운 서양식 석조 건물들은 단번에 순천시의 랜드마크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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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와츠기념관은 순천에서 활동했던 선교사들의 활동 거점이었다. 이 건물은 1925년 선교사 존 프레스톤(John Fairman Preston, 한국명 변요한)이 성경학원을 운영하기 위해 세운 건물로, 1층에는 윌리엄 린턴(William Alderman Linton)의 후손인 휴 린턴(Hugh Linton) 선교사 부부가 결핵 환자를 위해 세운 순천기독진료소가 지금도 운영되고 있으며, 2층에는 미국 남장로회 한국선교역사전시실이 있다. 그리고 3층은 주거공간으로, 호남 선교의 선구자인 유진 벨 선교사와 그 후손들이 이곳에서 어떻게 선교활동을 해나갔는가를 볼 수 있는 곳이다.

이 건물을 지을 때 후원했던 조지 와츠는 매산등 선교부 사택 7채 건립비용을 비롯해 병원과 학교 건축비, 그리고 선교사 13가정의 생활비까지 막대한 비용을 지원한 미국 남장로회 소속 평신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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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산등 흙돌담을 따라 올라가면 2004년 등록문화재 제123호로 지정된 매산중학교 매산관이 있다. 1930년에 설립된 매산관은 순천의 근대 석조 건축물을 대표하는 명물이다. 선교사들이 설립한 이 학교는 일제로부터 정식 학교 인가를 받지 못한 비인가 학교였지만 보통학교보다 학생 수도 많고 학생들의 자부심도 대단했다. 한때 신사참배 거부로 폐교 조치를 당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매산중학교로 변신, 순천 교육의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오늘날 매산고등학교가 있는 바로 그 자리에 무료 진료로 유명했던 알렉산더병원이 있었다. 1991년 화재로 소실되기까지 알렉산더병원은 의료선교를 통해 가난한 바닷가 마을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했다. 이곳에서 진료를 했던 의료선교사 다니엘 티몬스(Daniel Timons)가 쓴 기록(1916년) 속에서 당시의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공사가 끝나서 병원이 문을 열자 사람들이 홍수처럼 밀려들었다. 어떤 이들은 바로 이곳이 천국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 사람들은 이 병원이 미국인이나 일본인을 위한 병원이 아니라 가난하고 소외된 조선인을 위한 병원이라는 사실을 알고 놀라워했다. 많은 조선 사람들이 이곳에서 무료로 진료를 받으면서 처음으로 복음을 접했으며 예수를 구주로 받아들이기로 작정했다.”

지금도 학교 안에 남아 있는 존 프레스톤의 사택은 학생들이 미술실로 사용하고 있다.

그 아래쪽 양지 바른 언덕 위에 그림처럼 자리 잡은 코잇 가옥은 2005년에 전라남도문화재자료(제259호)로 지정됐다. 1913년 지하 1층, 지상 2층 석조 건물로 건립된 이 건물에는 로버트 코잇(Robert Thronwell Coit, 한국명 고라복)이 살았다. 일제강점기에는 이 주변에 약 20여 채의 가옥이 있었지만 지금은 6채만 남아 있다. 공간이 꽤 넓어서 교인들이 합동 예배를 드리기도 했던 이곳은 ‘에덴동산’이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지금은 애양재활직업보도소의 직원 숙소로 활용되고 있다.

순천 선교역사의 산 증인 중 한 사람인 안기창 목사(94세)는 지금도 매산등 언덕에 살고 있다. 그는 윌리엄 린턴과 함께 역동적인 선교활동을 전개했던 사람 중 하나다. 선교사들이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마을마다 섬마다 미신을 섬기는 풍습이 있었다. 바다와 하늘만 바라보고 살아야 하는 인간의 연약함을 반영하고 있는 바닷가 마을 사람들의 오랜 전통이었다. 윌리엄 린턴과 청년 안기창은 그러한 순천의 각 마을과 바다에 산재한 수많은 섬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개척했다. 그들은 이 사역을 ‘처치 플랜팅’(Church Planting)이라 불렀다.

“마치 교회를 심듯이 마을마다 복음을 전하고 정기적인 기도 모임을 갖도록 했고, 가정예배를 드리도록 인도했습니다. 그렇게 마을마다 하나둘씩 교회가 생겨났지요. 당시 우리의 생각은 동네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교회가 있어야 하고, 자기 마을에 교회가 없다 해도 그 사람이 사는 곳에서 10리 이내에 교회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전략은 점차 한반도 복음화라는 큰 계획으로 확대되었다. 그래서 당시 안기창 목사는 선교사들과 경상도와 충청도, 강원도까지 다니면서 교회 분포도를 조사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대한민국 복음화를 위해 약 1,500개의 교회가 더 있어야 한다는 내용의 조사 보고서를 미국 남장로교에 보고하기도 했다.

지금도 순천과 여수 지역에는 섬마다 마을마다 교회가 있다. 바닷가 마을에서 흔히 눈에 띄는 서낭당이나 토속 미신의 상징들이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100여 년 전 이 땅에 온 선교사들과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 받은 초대 성도들이 피땀을 흘리며 발로 뛰어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일군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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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 순천의 정체성은 선교사들에 의해 결정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선교사들이 오기 전 순천은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이름 없는 바닷가 마을에 불과했다. 하지만 벽안의 선교사들이 이곳에 머물기 시작하고, 그들이 세운 학교와 무료 진료소를 가기 위해 인근 지역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순천의 존재감도 함께 성장해 갔다.

순천을 향한 선교사들의 헌신은 대를 이어 계속되었다. 4대째 순천 선교의 역사를 이어가고 있는 유진 벨 선교사와 윌리엄 린턴 선교사 가문, 5명의 가족이 한국에 묻힌 크레인 선교사 가문을 비롯해 태어난 지 한 달 만에 풍토병으로 자녀를 잃고도 부흥회를 계속했던 프레스톤 선교사, 그리고 한국에 오자마자 두 자녀를 풍토병으로 잃었던 코잇 선교사 등이 있다. 이곳 순천 선교 지역에는 지금도 식지 않는 복음 전도의 열정으로 조선의 성도들을 위해 아낌없이 자신의 삶을 바쳤던 선교사들의 숨결이 생생하게 살아 있다.

 

금오도 이기풍목사순교기념관

이기풍은 평양신학교 1회 졸업생으로, 한국 장로교 최초의 한인 목사 7명 중에 한 사람이며 동시에 제주도 선교사였다. 그가 금오도와 인연을 맺은 것은 나이 70세 때였다. 2016-06-08 11;52;381908년 제주도로 간 그는 7년 만에 성내교회를 비롯한 15개 교회를 개척했다. 그 후 성대 이상을 치료하기 위해 육지로 왔다가 유진 벨 선교사의 강력한 요청에 의해 전라남도로 사역지를 옮기게 되었다.

당시 평양신학교 출신으로 한국 장로교 최초의 목사였던 이기풍은 한국 기독교계를 이끄는 지도자로서 큰 존경을 받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는 크고 안정된 교회를 마다하고 이름 없고 작은 교회만을 자청해서 찾아다니면서 썩어지는 밀알처럼 헌신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1938년, 일흔이란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수 금오도의 우학리교회로 부임했다. 그런데 그즈음, 한국 교계의 신사참배 거부운동이 시작되었고, 일제는 이들을 사납게 탄압했다. 하지만 이기풍 목사는 강경하게 저항했다. 신사참배를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쌀 배급이 끊겨서 온 식구가 눈앞에서 굶주려 쓰러지는 상황에서도 그는 굳건하게 신앙을 지켰다. 자녀가 다니는 학교가 신사참배를 하기로 결정하면 자녀를 학교에서 데리고 나와서 신사참배를 하지 않는 다른 학교로 보냈다.

그뿐 아니라 순천노회 목회자 17명과 함께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펼쳤다. 그러다가 끝내 일제에 의해 투옥되었다. 그때가 1940년, 당시 72세의 고령이었던 이기풍 목사는 신사참배 거부를 주동했다는 이유로 모진 고문을 당하고 몸이 만신창이가 된 채 2년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는 이미 죽음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1942년 6월 13일 주일, 이기풍 목사는 우학리교회에서 마지막 성찬예식을 거행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성도들을 향해 “하나님 외에는 절대 다른 신을 섬겨서는 안 되며 아이들이 신사에 올라가서 놀지도 못하게 하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일주일 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소천했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이기풍은 금오도에 지울 수 없는 순교의 역사를 남겼다. 그리고 그가 흘린 순교의 피는 헛되지 않았다. 지금 금오도에는 22개의 교회가 있고, 인구의 60퍼센트가 기독교인이다. 또한 그가 마지막 생을 바쳤던 우학리교회 사람들은 그를 기리기 위해 이기풍목사순교기념관을 세웠다. 기념관 앞에는 순교의 피를 상징하는 붉디붉은 장미 정원을 조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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